어느 괴짜 감독의 도전, 평양냉면이 생각나네

어느 괴짜 감독의 도전, 평양냉면이 생각나네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빚가리>상업화로 치닫는 독립영화판의 특별한 이름, '고·봉·수'

'고봉수'라는 이름 세 글자는 한국 독립영화판에서 돌출된 봉우리처럼 들린다. '독립영화'라 하지만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지, 상업영화의 조악한 복사판에 불과하다는 푸념까지 나오는 세태에서 몇 안 되는 자신만의 고집과 방법론으로 작업하는 감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다른 독립적 작가들과 비교하면 딱히 예술혼을 불태운다거나 실험정신을 내세우진 않는다. 대체 뭐가 다른 것일까.

요즘 독립영화, 특히 차세대 경향을 유추할 수 있는 학생 단편영화에서 발견되는 부정적 영향 몇 가지를 들자면, 일단 뿌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라 세대 차원의 특징으로 각인된다. 기성세대가 여전히 꽉 쥐고 있는 시스템 아래에서 숙이고 들어갈 것인가, 그냥 참고 월급 '루팡'이 될 것인가 선택지만 주어지는 시대, 뭘 해도 주도적으로 참여할 기회가 드문 상황에서 청년세대가 주인의식 갖고 능동적으로 활약하길 기대하기란 어렵다.

아울러 장기 전망을 꿈꾸기 힘든 시류에서 그들이 만드는 영화 역시 진득하게 한 우물을 파기 힘들다. 여유도 없고 주변 돌아보기도 힘들다. 지역사회를 관찰하고 참여하거나, 한 분야에서 오래 자리를 잡지 못하니 같은 소재라도 얕고 옅다. 그런 상황에서 당장 튀는 걸 찾다 보니 독립영화의 개성 대신 상업영화 방법론을 쫓게 된다. 최근 단편영화를 지원하는 모 대기업 프로젝트 출신 작품들이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그러한 어두운 그림자 일부다. 단편영화조차 '블록버스터' 급 '때깔'이 선호된다면 대체 독립영화란 무엇일까?

고봉수 감독은 그런 왜곡된 흐름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의 영화는 그냥 보면 만만하지 않은 경력과 수상실적에도 불구하고 학생영화 마냥 투박한 데다 별다른 사회적 주장도 엿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이웃이라기엔 조금 괴짜 같은 이들, 하지만 우리 곁에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존재들의 소소한 일화가 코미디와 드라마를 넘나든다. 칼 같은 고증이나 혼신의 실험을 애쓰는 대신, 소수 제작진과 현장 주변 자원을 가용해 '가늘고 길게' 제작방식을 고수한다. 그래서 처음엔 이게 뭐야 피식대다가도 한 번 맛을 들이면 '평양냉면'처럼 계속 찾는다. 신작 <빚가리> 역시 그렇다.

그들 각자의 '빚가리'와 말 못할 고충이 뒤엉키다

▲ "빚가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도복 차림의 남자 몇이 외진 시골에서 뭔가를 열심히 만든다. 자세히 보니 활과 화살을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중이다. 리더는 솜씨가 어색한 동료에게 친절하게 기술을 전수해준다. 때가 되니 함께 사냥에 나선다. 어설픈 솜씨로 장비를 제조하는 모습에선 몰랐는데 그들이 만든 무기는 제법 쓸만해 보인다. 고라니나 멧돼지를 잡기에는 충분한 위력이다. 그들은 사냥과 채집, 농사로 생활하며 아이들에게 야생생활 지혜를 교육하기도 한다.

단체 이름이 범상치 않다. '돌뼈나무'는 생존법 교육하는 소규모 회사 형태지만, 오히려 대안적 공동체 성격이 짙다. 바깥 사회 복잡한 법제도 대신 단체 이름처럼 돌과 뼈, 나무 같은 자연에 의지해 의식주를 해결하는 지향 때문이다. 활 만드는 게 어색하던 '홍민' 역시 그 일원이다. 하지만 사실상 백수인 그런 홍민이 마땅하지 않은 아버지 '대복'이 찾아온다. 오랜만에 만난 부자는 격렬한 언쟁을 벌인다.

대복은 동네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영세 자영업자다. 빠듯한 살림이지만, 사회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아들 홍민이 눈에 밟힌다. 대복은 홍민을 데리고 정신과 상담도 받고, 정신 좀 차리라고 타박해 보지만 홍민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대머리 때문에 결혼도 못 한다며 기 싸움을 벌인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홍민의 누나 '수민'이 동생을 잡으러 오랜만에 고향에 도착하지만, 수민 역시 만만하지 않은 괴짜 캐릭터다. 서로 으르렁대던 부자는 이 강적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얼른 그가 돌아가기만 바란다.

대복이 운영하는 슈퍼는 요즘 운영이 힘들다. 변두리라 그리 많지 않은 월세도 밀리고 공과금도 미납된 지 오래다. 게다가 대복은 수민과 홍민의 엄마인 아내와 이혼 후 위자료도 지급해야 하는 처지다. 그런데 작은 슈퍼에는 무려 300만 원 넘는 미수금이 있다. 근처에서 무슨 무역업을 한다는 '원창'이 직원 '요섭'을 시켜 외상으로 한두 보루씩 가져간 담뱃값이다. 자식들은 미수금만 제때 받아도 월세랑 공과금은 다 내겠다며 대복을 힐책하고, 화가 잔뜩 난 대복은 원창과 다투지만, 정말 형편이 어려운지 원창은 선배로 모시던 대복에게 점점 불손한 행태를 보인다. 이제 세 남자의 인정사정 볼 것 없는 대립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지역'을 소비하지 않되, '지역'영화란 무엇인가를 묻는 영화

▲ "빚가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영화는 조치원 일대에서 촬영되었다. 하지만 '로컬' 배경이라 해서 도시인들이 흥미로워할 이국적 풍경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지역을 그저 이미지로 소비하는 '로컬'영화들과 궤를 달리하는 방법론이다. 그저 지방 중소도시 변두리 골목의 풍경이 펼쳐질 뿐이다. 돌뼈나무가 은둔생활하는 장소 역시 깊은 산속 판타지 공간이 아니라 명절 때 들르는 흔한 시골구석에 불과하다. 영화는 변두리 서민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 어쩌다 일어나는 일화를 풀어낼 따름이다. 제작진이 근거로 삼은 지역이 조치원일 뿐.

크레디트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이라 할 대복-홍민-원창 3인을 제외한 주변 인물과 스태프 이름이 많이 겹치기 때문이다. 프로듀서와 음악감독이 천연덕스럽게 주요 조역으로 출연하는 건 물론, 대부분 출연자는 말 그대로 동네 주민이다. 엔딩에 올라오는 제작사 '시네마다방'은 <빚가리> 제작팀이 함께 활동하는 조치원 유일의 독립예술영화극장 이름이기도 하다. 애초에 본 작품은 조치원 내에서만 촬영하고 지역 주민들의 협업으로 완성된 것이다.

제작배경 때문에 관공서 주도 관광홍보용으로 지원을 받는 '지역영화'와는 다른 결의 '로컬리티'가 이 영화에 두드러진다. 풍경이 아니라 사람 냄새가 조치원이라는 작은 동네 개성임을 웅변하는 양, 뜬금없이 주인공들 분쟁에서 구경꾼이 되거나 훈수를 두는 주민들 입담이 걸쭉하다. 아무리 봐도 전체관람가로 보이는데 15세 관람가로 개봉하는 건 그만큼 직설적으로 구수한 충청도 육담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욕설 수위가 생각보다 세다. 제목 역시 향토어로 '빚을 갚는다' 의미다. 영화 제목 덕분에 충청도 사투리 하나는 공인되는 셈이다.

주요 배경이 되는 가족의 생업, 제일슈퍼 역시 어디 시골길 한적한 슈퍼인 줄 알았건만, 너무나 평범한 변두리 주택가다. 저런 작은 슈퍼가 요즘에 오히려 찾기 드물 텐데, 평상이 놓인 작은 가게는 지난 세대의 유산처럼 보일 정도다. 동네 대소사가 유통되고, 안면 보증으로 외상 가능하던 시절의 풍경이 이 영화에 희미하게나마 존재하는 것이다. 조치원 읍내에는 이런 게 아직 가능한 것일까? 문득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극한대립 대신 한보씩 양보하는 주인공들의 미덕이 반가운 영화

▲ "빚가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주인공들은 소소한 갈등과 반목으로 제법 심각하게 충돌하며 온갖 슬랩스틱을 만들어낸다. 대복은 자식 농사도, 이혼 처리도, 미수금도 뭐 하나 되는 게 없다. 슈퍼 운영은 벼랑에 몰렸고 기가 센 딸은 아빠를 쥐락펴락 술주정이나 부리고, 아들은 몽상만 쫓으며 말은 지지리도 듣지 않는다. 차라리 확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일 테다. 아내와는 변호사를 통해서만 법적으로 처리되는 지경이다. 귀책 사유는 대복에게 있다.

홍민은 아버지에게 반항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것처럼 대복이 원창에게 모욕을 당하자 길길이 날뛰며 위험한 행동을 벌인다. 일은 오히려 더 커지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을 위해 사고를 치는 게 밉지만 않은 눈치다. 건장한 체구의 (과거 격투기에 종사한) 담뱃값 300만 원 미수금의 주인공 원창 역시 우락부락한 외모와 달리 심성은 한없이 여리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매와 덩치는 위협적이지만, '착하게 살자!'라고 이마에 쓰기라도 한 듯 원창은 입으로만 떠들 뿐이다.

<빚가리>의 대표적 실험요소라면, 인물의 영화 속 행동과 심리적 상상이 컬러vs흑백으로 대비되는 지점이다. 셋은 갈등을 거듭하며 일을 키우지만, 그래도 양보하고 사과하면 일이 풀릴 수 있을까 늘 망설인다. 그 고뇌의 찰나가 거친 흑백 톤으로 각인된다.

따지고 보면 지난 세대에선 말도 안되는 무법천지 같은 악습도 많긴 했지만, 툭탁거리다 이내 화해하곤 하는 자율적인 갈등 해소의 순간도 적지 않았다. 동네 대소사는 아날로그 공론장이라 할 몇몇 공간에서 논의되고 동네 어른들의 훈수로 조정되는 게 그리 드물지 않았다. 가족은 으르렁대며 갈등하다가도 외부의 위협 앞에선 함께 똘똘 뭉치는 공동체였고, 동네 선후배라는 건 폐쇄된 작은 사회의 폐단을 떠올리는 이들에겐 공포 그 자체일 테지만, 의외로 복잡한 문제를 유연하게 해결하는 유용성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빚가리>에는 그런 지난 시대의 향수, 도시공동체라 할 작은 동네의 자율성이 긍정적 면모 위주로 재현되는 광경이 가득하다.

영화는 그렇게 소소한 가족의 정, 사라져간 동네와 골목의 정취를 그저 향수에 기울어지지 않고 현재에 되살리고자 한다. 지역사회와 함께 한 걸음만 나아가려는 태도가 깊기에 가능한 방법론일 테다. 사회적 병폐를 고발하거나 전위적인 형식 실험에 치우치는 대신, 고봉수 감독과 영화 동료들은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제작과정부터 극장 상영까지 함께 웃고 떠들며 즐겁게 전 과정을 이어가길 택했다.

그런 작가의 의도와 방식을 이해한다면, <빚가리>는 물론 '고봉수 사단'이라 불리는 영화집단의 작업을 좀 더 근본적으로 조망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의외로 영화는 그저 가볍지만은 않은, '빚가리'의 근본 의미에 천착하는 면모도 종종 툭 하고 선보인다. 가족의 숙명과 세대 간 원치 않은 계승 같은 요소를 추출하는 것은 관객에게 주어진 여백의 몫일 테다.

<작품정보>

빚가리 DEBT
2023 한국 코미디
2024.10.16. 개봉 75분 15세 관람가
감독 고봉수
주연 문용일(홍민 역), 고성완(대복 역), 승형배(원창 역)
출연 장동우(돌뼈나무 대표 역), 시혜지(수민 역), 김요섭(원창수하 역),
주성빈(돌뼈나무1 역), 이정주(돌뼈나무2 역)
PD 시혜지
각본/편집 고봉수
제작 시네마다방
배급 필름다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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