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 363] 영화 <하이재킹>▲ 영화 <하이재킹> 스틸컷ⓒ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보는 영화에서 언젠가 경험한 듯한 익숙한 느낌을 받을 때면 조금은 혼란스러워진다. 작품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기 이전에 마음에서 어떤 희미한 장벽이 세워지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이 문제를 오롯이 창작자의 편협한 시각과 태도로 탓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유사한 소재를 이야기할 때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특히 현장에서) 관객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좁을 수 있고, 온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고 있어서다. 조금도 친숙하지 않은 것이 일순간 가깝게 여겨지는 이 감정은 그래서 위험하다.
과거에는 유사한 소재와 내러티브, 장면을 담은 작품에 안타까움을 토로하곤 했지만 요즘에는 조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이러한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과정에서 무엇을 힘주어 이야기하고자 했는지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기시감 하나로 한 작품을 평가하기엔 섣부른 부분이 있다. 설령 그것으로 그치는 작품일지라도, 결과물과는 달리 창작자의 의도가 작은 조각으로나마 어딘가에는 남겨져 있으리라 믿고 싶은 것이다.
"우리 다 같이 살아서 너처럼 억울한 사람은 만들지 말아야지."
영화 <하이재킹>은 1971년에 일어난 여객기 납치 사건인 'F27기 납북 미수 사건'이 모티브인 작품이다. 속초공항 발 김포국제공항 행 대한항공 소속의 여객기가 하이재킹 당해 납북될 뻔했으나 이강흔 기장과 전명세 조종사의 노력으로 승객 전원이 생존할 수 있었던 사건. 영화는 항공기라는 한정된 공간을 통해 서스펜스를 구축하고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진 인물들의 강인한 모습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자 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지점에서 태생적인 한계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관객들에게 선보인 바 있는 동류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다. 가깝게는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2022)이 있다. 테러와 용의자, 비행 상황에서의 대립과 위기, 긍정적 결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점이 오버랩된다. 이전에 존재했던 할리우드의 항공 테러 작품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장르적 반복에 의해 형성되는 '컨벤션(Convention)'으로도 여겨질 수 있지만 관객들의 기시감을 완전히 지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를 위해 김성한 감독이 선택한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실화를 기반으로 재현에 가까운 고증에 기대어 시대와 현장을 가져다 놓는 방법이 첫 번째다. 그 중심에는 여객기 조종사 태인(하정우 분)이 있다. 실제 인물인 전명세 조종사에 해당한다. 그는 상황이 제시하는 여러 딜레마 사이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의 최우선 가치를 지켜내고자 한다. 테러범인 용대(여진구 분)와도 직접적으로 대립하며 당시의 장면을 완성해 낸다.
두 번째는 딜레마의 문제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영화 <하이재킹>은 인물의 딜레마로 시작해서 딜레마로 끝나는 작품이다. 납북의 위험에 처한 비행기와 그런 상황을 만드는 인물 용대는 그 딜레마를 제시하기 위한 수단이다. 중요한 건, 어떤 것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중심인물이 결과적으로 어떤 선택을 해내는가다. 이 선택의 과정은 실재했던 사건과 숭고한 희생을 선택했던 실존 인물을 또렷하게 그려내는 중요한 요소에 해당된다.
두 번의 문제, 두 번의 딜레마
▲ 영화 <하이재킹> 스틸컷ⓒ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
작품 속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더 필요하다. 시작은 오프닝 시퀀스다. 영화는 주요 사건이 아닌, 1969년에 발생한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의 모티브 사건으로 시작된다. 이 장면에서 조종사 민수(최광일 분)는 선택을 강요당한다. 탑승객과 자신의 목숨을 살려서라도 월북을 할 것인지, 휴전선을 넘는 대신 높은 확률로 모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것인지.
여기에서 민수는 안전을 택한다. 월북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기를 몰고 쫓아온 태인에게 고개를 가로젓는 신호를 보낸다. 그 대가는 결코 적지 않다. 모두의 목숨을 살리기는 했으나 본인을 포함한 11명의 인질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겨진 이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다.
정확히 1년 뒤, 동일한 자리에서 태인 또한 같은 문제 앞에 놓이게 된다. 용대의 강요로 인한 월북을 할 것인가, 기수를 되돌릴 것인가. 상황은 조금 더 긴박하다. 휴전선을 경계로 두 국가의 전투기가 함께 출격한 상태에서 선례로 인한 격추 명령까지 떨어진 상황. 지난 사건의 경험 덕에 월북의 대가가 무엇인지 그는 잘 알고 있다. 물론 영화에서 그려지는 선택은 (영화적 작법으로 인해 조금 과장돼 있기는 하지만) 실제 사건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건, 이렇게 오버랩되는 두 번의 딜레마와 그 선택을 영화는 어떻게 바라보는지다. 이 자리에 용대의 과거 이야기가 놓인다.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이뤄지는 사건의 반복이 단순히 사상과 이념의 이분법적 논리만으로 촉발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오랜 시간 쌓여온 서로를 향한 증오와 불신이 개인의 영욕을 채우기 위한 기만, 부정과 함께 놓여 있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두 사건을 동일한 층위에서 나란히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구조화한 것은 이야기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장치였던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 영화는 구조적으로 딜레마의 문제를 강하게 드러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인물 구도가 개인의 대립으로 나아갈 여지가 많고, 시대적 고증에 따라 스케일을 키우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실재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것 역시 이야기를 확장하는 측면에서 발목을 잡는다. 과정과 결과의 주요 장면이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 경계 내부의 요인만으로 극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제약도 있다. 딜레마 지점에 해당되는 문제 역시 관객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 하나의 사건만으로는 빈약한 내러티브의 형성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다리는 두 사람... 이 영화의 진짜 '마침표'
▲ 영화 <하이재킹> 스틸컷ⓒ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
"첫 착륙을 축하한다. 잘했어."
한편, 착륙이라는 단어는 영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비행기의 납북'은 기체 및 탑승자들이 예정된 장소에 착륙하지 못했다는 뜻과 같다. 추락이나 폭발과 같은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반대로 말하자면, 착륙은 모두의 안전을 담보하는 말이다.
극 중 태인이라는 인물 개인에게도 이 단어는 의미가 크다. 그는 민수가 운행하는 비행기가 휴전선을 넘는 것, 예정된 착륙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 일로 자신은 군복을 벗어야 했고, 민수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고, 그의 가족들 역시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 문제는 민항사 항공기의 조종사가 되고 나서도 그를 따라다닌다. 1년 넘게 비행을 했으나 시도는 해보지 못한 착륙. 언제나의 착륙이 그렇듯이, 이번 착륙에도 모두의 안전이 걸려있을 뿐이다.
용대는 자신이 납치한 비행기와 함께 월북한 뒤 (그곳에 착륙해) 호위호식하기를 바랐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결국 착륙을 방해하려는 자와 무사히 해내려는 자 사이의 다툼으로 봐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목숨을 위협하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의 보편적인 모습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잠시 이어지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장면이 하나 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두 조종사를 기다리던 아내 영숙(김선영 분)과 문영(임세미 분)의 모습이다. 두 사람의 모습이야말로 냉전의 시대, 아니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분단의 현실을 잊지 않고 바라보는 이 영화의 진짜 마침표라는 생각이 든다. 세대가 옮겨가더라도 외면하거나 잊어서는 안 되는 자리들이 분명히 있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과 관련한 내용들이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모든 이야기를 현실 속의 장면과 연결 지어 파헤칠 필요는 없다. 어떤 이야기는 각색되거나 재창조된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은 경우도 있다.
다만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이 영화가 원래의 사건으로부터 크게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함께 두고 감상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 영화는 과거의 이야기에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실제 사건은 이 작품을 더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돼 줄 것이다. 순서는 어느 것이 먼저여도 좋지 않을까.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보는 영화에서 언젠가 경험한 듯한 익숙한 느낌을 받을 때면 조금은 혼란스러워진다. 작품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기 이전에 마음에서 어떤 희미한 장벽이 세워지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이 문제를 오롯이 창작자의 편협한 시각과 태도로 탓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유사한 소재를 이야기할 때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특히 현장에서) 관객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좁을 수 있고, 온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고 있어서다. 조금도 친숙하지 않은 것이 일순간 가깝게 여겨지는 이 감정은 그래서 위험하다.
과거에는 유사한 소재와 내러티브, 장면을 담은 작품에 안타까움을 토로하곤 했지만 요즘에는 조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이러한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과정에서 무엇을 힘주어 이야기하고자 했는지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기시감 하나로 한 작품을 평가하기엔 섣부른 부분이 있다. 설령 그것으로 그치는 작품일지라도, 결과물과는 달리 창작자의 의도가 작은 조각으로나마 어딘가에는 남겨져 있으리라 믿고 싶은 것이다.
"우리 다 같이 살아서 너처럼 억울한 사람은 만들지 말아야지."
영화 <하이재킹>은 1971년에 일어난 여객기 납치 사건인 'F27기 납북 미수 사건'이 모티브인 작품이다. 속초공항 발 김포국제공항 행 대한항공 소속의 여객기가 하이재킹 당해 납북될 뻔했으나 이강흔 기장과 전명세 조종사의 노력으로 승객 전원이 생존할 수 있었던 사건. 영화는 항공기라는 한정된 공간을 통해 서스펜스를 구축하고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진 인물들의 강인한 모습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자 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지점에서 태생적인 한계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관객들에게 선보인 바 있는 동류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다. 가깝게는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2022)이 있다. 테러와 용의자, 비행 상황에서의 대립과 위기, 긍정적 결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점이 오버랩된다. 이전에 존재했던 할리우드의 항공 테러 작품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장르적 반복에 의해 형성되는 '컨벤션(Convention)'으로도 여겨질 수 있지만 관객들의 기시감을 완전히 지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를 위해 김성한 감독이 선택한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실화를 기반으로 재현에 가까운 고증에 기대어 시대와 현장을 가져다 놓는 방법이 첫 번째다. 그 중심에는 여객기 조종사 태인(하정우 분)이 있다. 실제 인물인 전명세 조종사에 해당한다. 그는 상황이 제시하는 여러 딜레마 사이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의 최우선 가치를 지켜내고자 한다. 테러범인 용대(여진구 분)와도 직접적으로 대립하며 당시의 장면을 완성해 낸다.
두 번째는 딜레마의 문제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영화 <하이재킹>은 인물의 딜레마로 시작해서 딜레마로 끝나는 작품이다. 납북의 위험에 처한 비행기와 그런 상황을 만드는 인물 용대는 그 딜레마를 제시하기 위한 수단이다. 중요한 건, 어떤 것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중심인물이 결과적으로 어떤 선택을 해내는가다. 이 선택의 과정은 실재했던 사건과 숭고한 희생을 선택했던 실존 인물을 또렷하게 그려내는 중요한 요소에 해당된다.
두 번의 문제, 두 번의 딜레마
▲ 영화 <하이재킹> 스틸컷ⓒ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
작품 속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더 필요하다. 시작은 오프닝 시퀀스다. 영화는 주요 사건이 아닌, 1969년에 발생한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의 모티브 사건으로 시작된다. 이 장면에서 조종사 민수(최광일 분)는 선택을 강요당한다. 탑승객과 자신의 목숨을 살려서라도 월북을 할 것인지, 휴전선을 넘는 대신 높은 확률로 모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것인지.
여기에서 민수는 안전을 택한다. 월북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기를 몰고 쫓아온 태인에게 고개를 가로젓는 신호를 보낸다. 그 대가는 결코 적지 않다. 모두의 목숨을 살리기는 했으나 본인을 포함한 11명의 인질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겨진 이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다.
정확히 1년 뒤, 동일한 자리에서 태인 또한 같은 문제 앞에 놓이게 된다. 용대의 강요로 인한 월북을 할 것인가, 기수를 되돌릴 것인가. 상황은 조금 더 긴박하다. 휴전선을 경계로 두 국가의 전투기가 함께 출격한 상태에서 선례로 인한 격추 명령까지 떨어진 상황. 지난 사건의 경험 덕에 월북의 대가가 무엇인지 그는 잘 알고 있다. 물론 영화에서 그려지는 선택은 (영화적 작법으로 인해 조금 과장돼 있기는 하지만) 실제 사건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건, 이렇게 오버랩되는 두 번의 딜레마와 그 선택을 영화는 어떻게 바라보는지다. 이 자리에 용대의 과거 이야기가 놓인다.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이뤄지는 사건의 반복이 단순히 사상과 이념의 이분법적 논리만으로 촉발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오랜 시간 쌓여온 서로를 향한 증오와 불신이 개인의 영욕을 채우기 위한 기만, 부정과 함께 놓여 있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두 사건을 동일한 층위에서 나란히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구조화한 것은 이야기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장치였던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 영화는 구조적으로 딜레마의 문제를 강하게 드러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인물 구도가 개인의 대립으로 나아갈 여지가 많고, 시대적 고증에 따라 스케일을 키우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실재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것 역시 이야기를 확장하는 측면에서 발목을 잡는다. 과정과 결과의 주요 장면이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 경계 내부의 요인만으로 극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제약도 있다. 딜레마 지점에 해당되는 문제 역시 관객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 하나의 사건만으로는 빈약한 내러티브의 형성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다리는 두 사람... 이 영화의 진짜 '마침표'
▲ 영화 <하이재킹> 스틸컷ⓒ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
"첫 착륙을 축하한다. 잘했어."
한편, 착륙이라는 단어는 영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비행기의 납북'은 기체 및 탑승자들이 예정된 장소에 착륙하지 못했다는 뜻과 같다. 추락이나 폭발과 같은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반대로 말하자면, 착륙은 모두의 안전을 담보하는 말이다.
극 중 태인이라는 인물 개인에게도 이 단어는 의미가 크다. 그는 민수가 운행하는 비행기가 휴전선을 넘는 것, 예정된 착륙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 일로 자신은 군복을 벗어야 했고, 민수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고, 그의 가족들 역시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 문제는 민항사 항공기의 조종사가 되고 나서도 그를 따라다닌다. 1년 넘게 비행을 했으나 시도는 해보지 못한 착륙. 언제나의 착륙이 그렇듯이, 이번 착륙에도 모두의 안전이 걸려있을 뿐이다.
용대는 자신이 납치한 비행기와 함께 월북한 뒤 (그곳에 착륙해) 호위호식하기를 바랐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결국 착륙을 방해하려는 자와 무사히 해내려는 자 사이의 다툼으로 봐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목숨을 위협하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의 보편적인 모습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잠시 이어지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장면이 하나 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두 조종사를 기다리던 아내 영숙(김선영 분)과 문영(임세미 분)의 모습이다. 두 사람의 모습이야말로 냉전의 시대, 아니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분단의 현실을 잊지 않고 바라보는 이 영화의 진짜 마침표라는 생각이 든다. 세대가 옮겨가더라도 외면하거나 잊어서는 안 되는 자리들이 분명히 있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과 관련한 내용들이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모든 이야기를 현실 속의 장면과 연결 지어 파헤칠 필요는 없다. 어떤 이야기는 각색되거나 재창조된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은 경우도 있다.
다만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이 영화가 원래의 사건으로부터 크게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함께 두고 감상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 영화는 과거의 이야기에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실제 사건은 이 작품을 더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돼 줄 것이다. 순서는 어느 것이 먼저여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