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우리와 상관없이>요즘 우리들의 일상은 순탄하지 않다. 그저 소박하게 살아갈 뿐인데 신경 쓸 일도, 감당해야 할 부담도 어깨를 무겁게 만든다. 하루하루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오르막길을 끝도 없이 올라가는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찰나의 일탈, 잠시라도 '현실'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욕망이 샘 솟듯 분출되는 중이다. 어떻게든 잠시라도 해외로 여행을 떠나 나를 누구도 모르는 곳에서 해방감을 누리거나, 여의치 않으면 '집콕'을 하거나, 주말만이라도 일과를 떠올리지 않고 산이나 바다에 숨고 싶다.
영화는 오랫동안 시민들에게 적정가에 안전한 즐거움과 볼거리를 제공해 왔다. 할리우드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 역시 1929년 세계 대공황 시절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역할에 영화만큼 '가성비' 좋았던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인기를 끌던 장르는 <킹콩> 같은 판타지, 디즈니 애니메이션, 그리고 뮤지컬 등 잠시라도 꿈꿀 수 있게 만드는 것들 중심이었다. 극장에 와서까지 머리 싸매고 현실을 고민하고 싶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반대의 도전도 출현한다. 익숙한 것이 무너지고 세상이 급변할 때 혼란과 함께 새로운 게 꿈틀대는 찰나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반응하는 영화적 시도다. 익숙한 전통적 서사를 고수하지 않고 사회문제를 당위적으로 다루지도 않으면서 그 빈자리에 추상화처럼 그런 과거와 단절된 채 개별적 자아를 배치한다. 선형적 서사의 강박, 즉 기승전결에 따라 문제가 발생하고 갈등이 해소되는 전형을 따르지 않고, 현실을 어떻게 개인이 지각하는지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의 작업들이다.
언뜻 별 일 없는 일상의 나열 같지만 곰곰이 짚어보기 시작하면 묘한 구석이 솟아나는 영화, 평범하기 그지없는 장면들이 알고 보면 정교한 세공으로 직조된 영화, 최소규모 스태프와 함께 툭 던지듯 단기간에 촬영되어 어느새 완성되지만, 그저 휙휙 대충 만들지 않은 비범한 구석이 느껴지는 스타일, 비용을 절감하고 가볍게 작업하기 위해 익숙한 거리와 풍경을 흑백 톤으로 촬영하는 기법들, 이쯤 되면 한국독립영화를 즐겨 보는 이들에게 어떤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을 테다.
유형준 감독의 실험이 돋보이는 <우리와 상관없이>는 그런 '모던 영화' 범주에서 새롭게 툭 튀어나온 변주로 우리 곁에 슬그머니 다가온다.
재즈의 즉흥 선율이 화면의 여백을 채우는 것처럼
▲ "우리와 상관없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한 중년 여성이 침대에 누워 있다. 그런 여성을 사람들이 거듭 찾아온다. 그는 배우다. 오랜 시간 수고해 촬영한 영화가 오늘 막 첫 시사회를 마쳤다. 하지만 그 배우, '화령'은 촬영을 끝내자마자 집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응급실로 후송되는 우환을 겪은 참이다. 까딱 조금만 늦게 발견되었다면 생사가 불투명했을 상황이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병원에 갈 수 있었으니 천만다행이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후유증으로 며칠간 단기 기억상실을 포함해 한바탕 수난을 겪어야 했다. 처음 며칠간은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안정을 찾고 나자 겉보기엔 퇴원해도 괜찮을 만큼 건강이 회복된다. 하지만 문제는 고생해서 촬영한 기간의 기억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화령은 병문안을 온 영화 제작진에게 촬영과정과 시나리오를 캐묻기 시작한다.
시사회가 끝나고 영화의 PD와 동료 배우들, 그리고 감독이 차례로 화령의 집을 찾는다. 이들은 각자 배우의 건강을 염려하고 시사회가 별 탈 없이 잘 마쳤다는 소식을 전한다. 정작 영화에 대한 기억이 부재한 화령은 영화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자기 연기는 어땠는지 질문을 던지지만 각각의 대답은 모호하기 그지없고, 방문객들은 자기 고민과 심경을 토로하기 바쁘다.
PD가 맨 처음 화령의 집을 방문한다. 꽃을 들고 방문한 그는 자기밖에 모르는 감독을 규탄하며 배우에게 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한다. 훈훈한 덕담이 오가는 것 같지만 분위기는 점점 묘하게 흘러간다. 그는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다 과몰입하기도, 화령이 영화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간파하기도 한다. 뒤이어 후배 여배우 '이영'이 손수 쓴 편지를 들고 화령을 찾는다. 예쁜 후배라며 반기는 그이지만, 이영은 선배를 존경한다면서도 죄송한 일이 있다며 화령을 혼란하게 만든다.
밤이 꽤 깊었는데 어떻게 보면 예의 없이 뒤이어 남자 스태프들이 거듭 연락 온다. 감독은 유령처럼 어둠 속에서 등장해 선문답을 나누다 홀연히 사라진다. 그다음 차례는 영화 속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두 남자배우다. 젊은 남배우 '정선'은 영화의 결말에 대해 일화를 늘어놓지만, 그가 해설하는 내용은 앞서 방문했던 '이영'의 줄거리와는 뭔가 다르게 흘러간다. 화령은 내가 깜빡했네 하며 얼버무리지만 그를 바라보는 방문객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혼란한 가슴을 진정시키고 화령은 늦은 잠자리에 든다.
꿈처럼, 환상처럼 대구를 이루는 1부와 2부의 데칼코마니
▲ "우리와 상관없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우리와 상관없이>는 친절하게 지금 영화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주는 주류 영화와는 안드로메다은하처럼 아득하게 거리가 먼 작업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현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거리로 순간이동을 시켜버린 것 같은 설정이 2024년 인사동 골목길로 다시 공간을 도약한 마냥 펼쳐지는 풍경이라면 모를까. 등장인물들은 화령이라는 항성을 중심으로 질리지도 않고 반복해서 공전하지만, 그 궤적은 안정된 타원이 아니라 종종 돌출하는 불규칙한 모양으로 일그러진다. 그럴 순간마다 영화를 보던 이들은 당연히 동일한 궤도와 속도로 이행되리라 안심하다 뒤통수를 맞는 격이다.
대체 이런 트릭을 통해 감독이 관객에게 무슨 주제를 전달하려고 하는가? 관객은 당연히 질문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감독이 거기에 일목요연한 답변을 준비하긴 한 걸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후반으로 갈수록 더 또렷해진다는 것이다. 마치 몇 가지 핵심적인 키워드만 입력하고 A.I.가 자유연상으로 알레고리를 만들어놓으면, 얼핏 보기엔 뭔가 설정과 체계가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껍데기만 그렇게 갖췄을 분임을 확인하는 허탈함 같은 기분이다. 감독은 영화라는 게 거창하게 가치와 함의를 무게 잡아가며 설치하고 고결한 주제의식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영상기법의 급속한 발전도상에서 기술적 특이점으로 대두된 거라는 원론적 이야기를 새롭게 설정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원래 영화의 출발점은 우리가 괜히 오해하듯 일목요연한 줄거리가 있는 일사불란한 서사가 아니긴 하다.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처음 선보인 '영화'는 그저 열차가 역으로 도착하고,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퇴근하는 장면을 당시로선 첨단 장비와 테크닉을 이용해 원래 그저 흘러가 버려야 할 순간을 필름에 가둬버린 데 가깝다. 그렇게 기계장치가 제공하는 모호한 경이로움, 그 자체로는 의지를 갖고 전달하지 않지만 이를 보는 관객들은 각자의 시각과 해석을 통해 풍부화하는 과정의 무한 반복운동을 수행하는 일련의 과정을 다시 시작해보자는 제안이라면 제안일까?
물론 팝콘과 함께 킬링타임으로 영화를 소화하기만 할 경우, 관객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솟구치게 할 그런 시도는 감독의 만용으로 그치는 게 고작일 테다. 다행히 그런 위기는 잘 빗겨난다. 유독 눈에 튀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말이다. 영화에선 평행우주처럼 스윽 처리되지만, 실제 현실 제작현장에서 독립영화감독의 통제받지 않는 권위가 너무 온정적으로 합리화되긴 한다. 아마 이 영화를 만든 이의 '감독 DNA'가 본능적으로 발현되었을 돌출지점이다. 솔직히 해당 지점의 묘사는 영화 초반에 화령 앞에서 PD가 감독을 물고 뜯고 씹어대는 장면이 더 쾌감과 설득력이 넘치긴 한다. 다행히 과도하게 오남용되진 않아서 여흥 겸 숨 쉴 통로로 기능하는 편이다.
<우리와 상관없이>는 그 제목이 주는 역설과는 상반되게 너무 심각하게 영화라는 대상을 대하지 않을 때 오히려 자유롭게 도전해 도달 가능한 영역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 영화에는 우리를 안심시킬 정답이 제공되지 않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영화가 제공하는 기본 메뉴를 개별 관객이 자유롭게 조합해 화령이 우연히 발견한 낯선 모험에 도달하길 기대하는 셈이다. 거대 서사에 공분하거나 너무 쉽게 수긍하는 대신, 모든 가능성에 주목하고 열린 시선으로 관찰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이 영화에서 우리 곁에 숨은 또 다른 차원 우주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21세기 영화의 모험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작품정보>
우리와 상관없이 Regardless of Us
2023│한국│드라마
2024.06.26. 개봉│81분│12세 관람가
감독 유형준
출연 조현진, 곽민규, 최성원, 김미숙, 조소연, 이양희
제작 영화사 능소
배급 필름다빈
2023 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부문
2023 24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심사위원 특별언급
2023 47회 상파울루국제영화제, 신인경쟁부문
영화는 오랫동안 시민들에게 적정가에 안전한 즐거움과 볼거리를 제공해 왔다. 할리우드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 역시 1929년 세계 대공황 시절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역할에 영화만큼 '가성비' 좋았던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인기를 끌던 장르는 <킹콩> 같은 판타지, 디즈니 애니메이션, 그리고 뮤지컬 등 잠시라도 꿈꿀 수 있게 만드는 것들 중심이었다. 극장에 와서까지 머리 싸매고 현실을 고민하고 싶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반대의 도전도 출현한다. 익숙한 것이 무너지고 세상이 급변할 때 혼란과 함께 새로운 게 꿈틀대는 찰나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반응하는 영화적 시도다. 익숙한 전통적 서사를 고수하지 않고 사회문제를 당위적으로 다루지도 않으면서 그 빈자리에 추상화처럼 그런 과거와 단절된 채 개별적 자아를 배치한다. 선형적 서사의 강박, 즉 기승전결에 따라 문제가 발생하고 갈등이 해소되는 전형을 따르지 않고, 현실을 어떻게 개인이 지각하는지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의 작업들이다.
언뜻 별 일 없는 일상의 나열 같지만 곰곰이 짚어보기 시작하면 묘한 구석이 솟아나는 영화, 평범하기 그지없는 장면들이 알고 보면 정교한 세공으로 직조된 영화, 최소규모 스태프와 함께 툭 던지듯 단기간에 촬영되어 어느새 완성되지만, 그저 휙휙 대충 만들지 않은 비범한 구석이 느껴지는 스타일, 비용을 절감하고 가볍게 작업하기 위해 익숙한 거리와 풍경을 흑백 톤으로 촬영하는 기법들, 이쯤 되면 한국독립영화를 즐겨 보는 이들에게 어떤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을 테다.
유형준 감독의 실험이 돋보이는 <우리와 상관없이>는 그런 '모던 영화' 범주에서 새롭게 툭 튀어나온 변주로 우리 곁에 슬그머니 다가온다.
재즈의 즉흥 선율이 화면의 여백을 채우는 것처럼
▲ "우리와 상관없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한 중년 여성이 침대에 누워 있다. 그런 여성을 사람들이 거듭 찾아온다. 그는 배우다. 오랜 시간 수고해 촬영한 영화가 오늘 막 첫 시사회를 마쳤다. 하지만 그 배우, '화령'은 촬영을 끝내자마자 집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응급실로 후송되는 우환을 겪은 참이다. 까딱 조금만 늦게 발견되었다면 생사가 불투명했을 상황이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병원에 갈 수 있었으니 천만다행이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후유증으로 며칠간 단기 기억상실을 포함해 한바탕 수난을 겪어야 했다. 처음 며칠간은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안정을 찾고 나자 겉보기엔 퇴원해도 괜찮을 만큼 건강이 회복된다. 하지만 문제는 고생해서 촬영한 기간의 기억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화령은 병문안을 온 영화 제작진에게 촬영과정과 시나리오를 캐묻기 시작한다.
시사회가 끝나고 영화의 PD와 동료 배우들, 그리고 감독이 차례로 화령의 집을 찾는다. 이들은 각자 배우의 건강을 염려하고 시사회가 별 탈 없이 잘 마쳤다는 소식을 전한다. 정작 영화에 대한 기억이 부재한 화령은 영화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자기 연기는 어땠는지 질문을 던지지만 각각의 대답은 모호하기 그지없고, 방문객들은 자기 고민과 심경을 토로하기 바쁘다.
PD가 맨 처음 화령의 집을 방문한다. 꽃을 들고 방문한 그는 자기밖에 모르는 감독을 규탄하며 배우에게 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한다. 훈훈한 덕담이 오가는 것 같지만 분위기는 점점 묘하게 흘러간다. 그는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다 과몰입하기도, 화령이 영화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간파하기도 한다. 뒤이어 후배 여배우 '이영'이 손수 쓴 편지를 들고 화령을 찾는다. 예쁜 후배라며 반기는 그이지만, 이영은 선배를 존경한다면서도 죄송한 일이 있다며 화령을 혼란하게 만든다.
밤이 꽤 깊었는데 어떻게 보면 예의 없이 뒤이어 남자 스태프들이 거듭 연락 온다. 감독은 유령처럼 어둠 속에서 등장해 선문답을 나누다 홀연히 사라진다. 그다음 차례는 영화 속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두 남자배우다. 젊은 남배우 '정선'은 영화의 결말에 대해 일화를 늘어놓지만, 그가 해설하는 내용은 앞서 방문했던 '이영'의 줄거리와는 뭔가 다르게 흘러간다. 화령은 내가 깜빡했네 하며 얼버무리지만 그를 바라보는 방문객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혼란한 가슴을 진정시키고 화령은 늦은 잠자리에 든다.
꿈처럼, 환상처럼 대구를 이루는 1부와 2부의 데칼코마니
▲ "우리와 상관없이"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우리와 상관없이>는 친절하게 지금 영화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주는 주류 영화와는 안드로메다은하처럼 아득하게 거리가 먼 작업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현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거리로 순간이동을 시켜버린 것 같은 설정이 2024년 인사동 골목길로 다시 공간을 도약한 마냥 펼쳐지는 풍경이라면 모를까. 등장인물들은 화령이라는 항성을 중심으로 질리지도 않고 반복해서 공전하지만, 그 궤적은 안정된 타원이 아니라 종종 돌출하는 불규칙한 모양으로 일그러진다. 그럴 순간마다 영화를 보던 이들은 당연히 동일한 궤도와 속도로 이행되리라 안심하다 뒤통수를 맞는 격이다.
대체 이런 트릭을 통해 감독이 관객에게 무슨 주제를 전달하려고 하는가? 관객은 당연히 질문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감독이 거기에 일목요연한 답변을 준비하긴 한 걸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후반으로 갈수록 더 또렷해진다는 것이다. 마치 몇 가지 핵심적인 키워드만 입력하고 A.I.가 자유연상으로 알레고리를 만들어놓으면, 얼핏 보기엔 뭔가 설정과 체계가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껍데기만 그렇게 갖췄을 분임을 확인하는 허탈함 같은 기분이다. 감독은 영화라는 게 거창하게 가치와 함의를 무게 잡아가며 설치하고 고결한 주제의식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영상기법의 급속한 발전도상에서 기술적 특이점으로 대두된 거라는 원론적 이야기를 새롭게 설정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원래 영화의 출발점은 우리가 괜히 오해하듯 일목요연한 줄거리가 있는 일사불란한 서사가 아니긴 하다.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처음 선보인 '영화'는 그저 열차가 역으로 도착하고,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퇴근하는 장면을 당시로선 첨단 장비와 테크닉을 이용해 원래 그저 흘러가 버려야 할 순간을 필름에 가둬버린 데 가깝다. 그렇게 기계장치가 제공하는 모호한 경이로움, 그 자체로는 의지를 갖고 전달하지 않지만 이를 보는 관객들은 각자의 시각과 해석을 통해 풍부화하는 과정의 무한 반복운동을 수행하는 일련의 과정을 다시 시작해보자는 제안이라면 제안일까?
물론 팝콘과 함께 킬링타임으로 영화를 소화하기만 할 경우, 관객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솟구치게 할 그런 시도는 감독의 만용으로 그치는 게 고작일 테다. 다행히 그런 위기는 잘 빗겨난다. 유독 눈에 튀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말이다. 영화에선 평행우주처럼 스윽 처리되지만, 실제 현실 제작현장에서 독립영화감독의 통제받지 않는 권위가 너무 온정적으로 합리화되긴 한다. 아마 이 영화를 만든 이의 '감독 DNA'가 본능적으로 발현되었을 돌출지점이다. 솔직히 해당 지점의 묘사는 영화 초반에 화령 앞에서 PD가 감독을 물고 뜯고 씹어대는 장면이 더 쾌감과 설득력이 넘치긴 한다. 다행히 과도하게 오남용되진 않아서 여흥 겸 숨 쉴 통로로 기능하는 편이다.
<우리와 상관없이>는 그 제목이 주는 역설과는 상반되게 너무 심각하게 영화라는 대상을 대하지 않을 때 오히려 자유롭게 도전해 도달 가능한 영역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 영화에는 우리를 안심시킬 정답이 제공되지 않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영화가 제공하는 기본 메뉴를 개별 관객이 자유롭게 조합해 화령이 우연히 발견한 낯선 모험에 도달하길 기대하는 셈이다. 거대 서사에 공분하거나 너무 쉽게 수긍하는 대신, 모든 가능성에 주목하고 열린 시선으로 관찰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이 영화에서 우리 곁에 숨은 또 다른 차원 우주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21세기 영화의 모험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작품정보>
우리와 상관없이 Regardless of Us
2023│한국│드라마
2024.06.26. 개봉│81분│12세 관람가
감독 유형준
출연 조현진, 곽민규, 최성원, 김미숙, 조소연, 이양희
제작 영화사 능소
배급 필름다빈
2023 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부문
2023 24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심사위원 특별언급
2023 47회 상파울루국제영화제, 신인경쟁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