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귀한 시절, 서빙고 털었던 '조선판 도둑들'

얼음 귀한 시절, 서빙고 털었던 '조선판 도둑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차태현-오지호 주연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최근엔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집에 TV가 없는 가정이 적지 않다. 컴퓨터나 태블릿 PC, 스마트폰처럼 TV를 대체할 수 있는 상품들이 많아진 이유도 있고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선 교육적인 이유 때문에 TV를 없애기도 한다. 하지만 각 가정의 경제사정과 사용빈도에 따라 크기나 성능은 다르더라도 냉장고가 없는 가정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김치냉장고와 와인냉장고, 온장고 등 기능에 따라 여러 대의 냉장고를 두는 집도 적지 않다.

이처럼 지금은 냉장고가 없는 가정을 찾기 힘들지만 사실 '1가정 1냉장고'가 당연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65년 금성사가 국내에서 처음 냉장고를 출시한 후 1980년까지만 해도 가정의 냉장고 보급률은 40%가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1990년대 초반 냉장고 보급률이 100%에 가깝게 올라갔다. 실제로 그 시절에는 최고의 스타들이 냉장고 광고의 모델로 발탁되곤 했다.

하지만 냉장고가 없던 과거에도 얼음을 보관하는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냉장고가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동빙고와 서빙고 같은 얼음보관창고가 존재해 나라에서 체계적으로 얼음을 보관·관리했다. 그리고 2012년에 개봉한 이 영화에서는 얼음독점권을 가지고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부패한 권력에 맞서는 도둑들의 이야기가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바로 2012년 여름 극장가를 시원하게 했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천만 영화 <도둑들>과 맞붙어 500만 가까운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주)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드라마-영화 오가며 꾸준히 활동하는 배우

1976년 목포에서 태어난 오지호는 육군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군복무를 마친 후 1998년 정지영 감독의 영화 <까>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데뷔했다. 그 후 모델로 활동하던 오지호는 2000년 여균동 감독의 문제작 <미인>에서 과감한 노출연기를 선보이며 주목 받았다. <미인>은 남녀 주인공의 노출과 아쉬운 서사로 많은 논란과 비판이 있었지만 서울에서만 19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02년 섹시코미디 영화 <은장도>에 출연한 오지호는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동하다가 2004년 드라마 <두 번째 프로포즈>와 2005년 <신입사원>을 통해 배우로 인정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6년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서 기억상실에 걸린 재미교포 부동산 재벌 안나 조(한예슬 분)를 데리고 사는 장철수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며 2006년 MBC 연기대상에서 우수상과 인기상, 베스트 커플상을 휩쓸었다.

오지호는 <환상의 커플> 이후 <칼잡이 오수정>과 <싱글파파는 열애중> <내조의 여왕> <추노> 등에서 다양한 매력을 선보이며 전성기를 달렸다. 오지호는 2011년 <조폭마누리3> 이후 5년 만에 한국 최초의 3D 영화 < 7광구 >에 출연했지만 < 7광구 >는 엄청난 혹평과 함께 흥행에도 실패했다. 하지만 오지호는 곧바로 차태현과 함께 2012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백동수를 연기하면서 490만 관객을 모으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오지호는 2013년 드라마 <직장의 신>에서 마케팅 영업부 팀장 장규직 역을 맡아 김혜수와 좋은 연기호흡을 보여줬고 2016년에는 <오 마이 금비>에서 아역배우 허정은과 부녀연기를 선보였다. 2013년 KBS 연기대상에서 우수연기상과 함께 김혜수와 베스트커플상을 수상한 오지호는 2016년 KBS 연기대상에서는 허정은과 베스트커플에 선정됐다. 2018년 드라마 <왜그래 풍상씨>에서는 풍상 형제들의 둘째 이진상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오지호는 드라마에서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는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후 관객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2015년에 개봉해 21만 관객을 동원했던 <연애의 맛>을 제외하면 전국관객 5만을 넘긴 영화조차 찾기 힘들 정도. 오지호는 2023년에도 서효림, 김승수와 함께 2022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된 액션영화 <인드림>에 출연했지만 전국관객 2005명에 그치고 말았다. 

<도둑들>과 2012년 여름 흥행 '쌍끌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속 이덕무(오른쪽)와 백동수는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했지만 영화 속 이야기들은 대부분 허구다.ⓒ (주)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1939년에 개봉했던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영화와 제목이 같다. 미국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물가상승률을 적용하면 무려 42억 달러의 흥행성적이 나올 정도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명작이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한국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음모에 맞서 조선시대 얼음창고 서빙고를 터는 도둑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한창 날씨가 더웠던 2012년 여름에 개봉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여름 성수기가 한창인 2012년 8월 8일에 개봉했지만 개봉시기가 마냥 좋았다고 할 수 없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봉 2주 전인 7월25일에 김윤석과 김혜수, 이정재, 전지현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최동훈 감독의 신작 <도둑들>이 개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2014년 여름 <해적: 바다로 간 산적>처럼 '2등 전략'을 잘 고수하면서 500만 가까운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사실 <도둑들>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2012년 여름을 공략하는 한국영화라는 점 외에도 공통점이 적지 않다. <도둑들>은 리더 마카오 박(김윤석 분)이 각계각층의 전문 도둑들을 모아 마카오 카지노에 전시된 다이아몬드를 훔치는 내용의 영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역시 우의정의 서자인 이덕무(차태현 분)가 도굴전문가, 폭탄전문가, 변장전문가, 잠수전문가 등을 모아 얼음을 훔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덕무와 백동수(오지호 분)는 서빙고에서 얼음을 훔쳐 부패한 관리의 횡포를 알리고 그들을 몰아내려는 나름 '선한 목적'을 가지고 도둑질을 계획했다. 하지만 냉동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관리하던 귀한 얼음을 훔치다 붙잡혔다면 이들은 모두 중범죄인들로 참수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코미디 영화이기 때문에 이덕무의 기지와 인물들의 활약으로 무사히 얼음 탈취에 성공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후 이렇다 할 영화 흥행작을 만나지 못한 오지호와 달리 차태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봉 후 5년이 지난 2017년 <신과 함께-죄와 벌>을 통해 커리어 첫 천만 영화를 만났다. 사실 차태현은 한국영화계에서 대표적으로 운이 좋은 배우로 꼽히는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각 분야에 주특기가 있었던 다른 인물들과 달리 차태현이 연기한 이덕무는 직접 몸을 쓰기 보다는 입으로 계획을 세우는 인물이었다.

이덕무-백동수 가족 만들어준 여인
  민효린이 연기한 백수련은 해녀였던 본업을 활용해 덕무 일행의 잠수요원으로 활약했다.ⓒ (주)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지난 2018년 빅뱅의 멤버 태양과 결혼해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 민효린은 2011년 강형철 감독의 <써니>에서 수지 역으로 주목 받은 후 이듬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백동수의 동생 백수련을 연기했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그저 이덕무가 첫눈에 반한 미모의 여인에 머무는 듯했지만 이덕무가 물을 활용한 얼음운반을 계획한 후에는 해녀인 본업을 살려 영화 후반 잠수요원으로 맹활약한다.

여러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신 스틸러로 활약하다가 2018년 <미스터 션샤인>의 행랑아범, 2019년 <호텔 델루나>의 김선비 역으로 시청자들에게 사랑 받은 배우 신정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폭약 전문가 석대현을 연기했다. 출중한 실력에 비해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손해를 볼 때가 많지만 영화 후반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활용해 엄청난 소음을 내는 '폭음탄'을 개발했다.

데뷔 초 고 장진영을 닮은 외모로 '리틀 장진영'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채영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정보수집에 탁월한 능력을 자랑하는 기생 설화를 연기했다. 이채영이 여러 작품에서 섹시함이 강조되는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던 것과 달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설화는 기생임에도 상당히 지적인 캐릭터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어린 여자아이 난이 역은 <신과 함께> 시리즈로 '쌍천만 배우'가 되는 김향기가 맡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어린 나이에도 상당히 총명한 두뇌를 뽐내며 난항에 빠진 이덕무와 무리들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는 소년이 등장한다. 정군으로 불리던 이 소년은 석대현 밑에서 폭약기술을 배워 폭음탄 제조에도 큰 도움을 줬다. 훗날 성장한 정군은 장원급제를 하고 정조대왕을 만나는데 이때 밝힌 그의 본명은 조선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었고 성장한 정약용을 연기한 배우는 바로 신예 시절의 송중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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