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피해자 증언 담은 '되살아나는 목소리'
재일동포 모녀 감독 박수남, 박마의 연출
40년가량 찍은 영상으로 민족의 비극 기록
필름 부식 전 디지털화로 복원한 피해자 목소리박수남(오른쪽), 박마의 모녀 감독이 디지털 복원 작업에 앞서 예전 촬영한 필름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네마 달 제공
고깃집을 했다. 장사는 잘됐다. 손님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야쿠자가 찾아와 행패를 부릴 정도였다. 작가 일을 병행하며 한 사업은 그렇게 번창했다. 하지만 고깃집을 팔아야 했다. 재일조선인들의 신산했던 삶을 카메라로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박수남(89) 감독 이력의 시작이었다.
박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 이들은 '살아남은 재일조선인'이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 노역에 끌려갔다가 원폭 피해를 입은 이들이었다. 사각지대에 놓인 한국 거주 피폭자들과 또는 위안부 할머니 등도 기록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나라라는 보호막을 잃어 시대의 광풍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는 거다. 16㎜필름으로 그들을 촬영한 영상은 '또 하나의 히로시마- 아리랑의 노래'(1987),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에서의 증언'(1991) 등 다큐멘터리영화 4편이 됐다.
1985년부터 촬영한 필름 분량은 10만 피트(약 30㎞)에 달했다. 영화화되지 않은 필름 대부분이 시간에 의해 소멸될 위기에 놓였다. 박 감독은 딸 박마의(56) 감독과 함께 필름을 디지털로 복원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재일동포 모녀 감독은 시간에 묻혀 있던 기록들과 다시 마주하게 됐다. 다큐멘터리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13일 개봉)가 만들어진 계기다.
'되살아나는 목소리'에는 여러 사람의 증언이 담겨 있다. 대부분 담담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나 발화가 담고 있는 내용은 끔찍하다. 서정우(1928~2001)씨는 14세 때 하시마(군함도) 지하 탄광에 끌려갔다. 그는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피폭돼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지옥 같은 지하 탄광 생활을 못 견뎌 수차례 목숨을 끊으려 했던 그는 피폭 이후 아이들 때문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가 1986년 박수남 감독과 하시마를 찾아 과거를 돌아보는 장면은 암울했던 한국 근현대사를 들춘다.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씨가 생전 박수남 감독을 만나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시네마 달 제공
피폭으로 한쪽 눈을 잃은 김정순씨와 시각장애가 생긴 이영인씨가 만나 대화하는 장면 역시 가슴을 누른다. 둘이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당시 "번개가 친 줄 알았다"고 무심하게 회고하는 대목은 교과서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한 장면이다. 1919년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전동례(1898~1992)씨가 치매를 앓는 와중에도 일제 만행을 또렷이 기억해내는 모습이 서늘하기도 하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라는 제목을 실감하게 된다.
영화는 과거 영상만을 이어 붙이지 않는다. 박수남 감독이 기록을 위해 보낸 인생을 돌아보기도 한다. 건축업자 아버지 덕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던 박 감독은 해방을 맞은 열 살 때까지 천왕을 신으로 여겼던 '황국 소녀'였다. 성인이 될 때까지 재일조선인의 비참한 삶을 잘 알지 못했다.
박 감독의 인생을 바꾼 건 1958년 발생한 고마쓰가와 사건이다. 재일조선인 2세 이진우가 여고생을 살해해 시체를 유기한 후 요미우리신문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범행을 알려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다. 박 감독은 이진우가 극도로 가난한 환경에서 차별받으며 자란 점에 주목했다. 이진우와 교류하며 민족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한편 피해자 가족을 찾아 아픔을 달랬다. 이후 박 감독은 재일조선인들을 만나 그들이 겪은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박 감독이 펜에서 카메라로 기록 매체를 바꾼 건 피해자들의 침묵 때문이었다. 재일조선인들이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자 그들 표정이 담고 있는 메시지라도 기록하겠다는 심사였다. 박 감독은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한 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영화를 찍으며 가장 힘들었던 게 피해자들의 침묵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피폭 피해자 분들이 이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 오셨나 하는 것을 담기 위해 마음을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비프메세나상, 서울독립영화제 독불장군상 등을 수상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스페셜 부문, 대만국제여성영화제 등에 초청되기도 했다. 12세 이상 관람가.
재일동포 모녀 감독 박수남, 박마의 연출
40년가량 찍은 영상으로 민족의 비극 기록
필름 부식 전 디지털화로 복원한 피해자 목소리박수남(오른쪽), 박마의 모녀 감독이 디지털 복원 작업에 앞서 예전 촬영한 필름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네마 달 제공
고깃집을 했다. 장사는 잘됐다. 손님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야쿠자가 찾아와 행패를 부릴 정도였다. 작가 일을 병행하며 한 사업은 그렇게 번창했다. 하지만 고깃집을 팔아야 했다. 재일조선인들의 신산했던 삶을 카메라로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박수남(89) 감독 이력의 시작이었다.
박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 이들은 '살아남은 재일조선인'이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 노역에 끌려갔다가 원폭 피해를 입은 이들이었다. 사각지대에 놓인 한국 거주 피폭자들과 또는 위안부 할머니 등도 기록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나라라는 보호막을 잃어 시대의 광풍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는 거다. 16㎜필름으로 그들을 촬영한 영상은 '또 하나의 히로시마- 아리랑의 노래'(1987),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에서의 증언'(1991) 등 다큐멘터리영화 4편이 됐다.
필름 10만 피트 분량 디지털화 중 영화 제작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에서 피폭 피해자인 이영인(왼쪽)씨외 김정순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시네마 달 제공1985년부터 촬영한 필름 분량은 10만 피트(약 30㎞)에 달했다. 영화화되지 않은 필름 대부분이 시간에 의해 소멸될 위기에 놓였다. 박 감독은 딸 박마의(56) 감독과 함께 필름을 디지털로 복원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재일동포 모녀 감독은 시간에 묻혀 있던 기록들과 다시 마주하게 됐다. 다큐멘터리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13일 개봉)가 만들어진 계기다.
'되살아나는 목소리'에는 여러 사람의 증언이 담겨 있다. 대부분 담담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나 발화가 담고 있는 내용은 끔찍하다. 서정우(1928~2001)씨는 14세 때 하시마(군함도) 지하 탄광에 끌려갔다. 그는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피폭돼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지옥 같은 지하 탄광 생활을 못 견뎌 수차례 목숨을 끊으려 했던 그는 피폭 이후 아이들 때문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가 1986년 박수남 감독과 하시마를 찾아 과거를 돌아보는 장면은 암울했던 한국 근현대사를 들춘다.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씨가 생전 박수남 감독을 만나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시네마 달 제공
피폭으로 한쪽 눈을 잃은 김정순씨와 시각장애가 생긴 이영인씨가 만나 대화하는 장면 역시 가슴을 누른다. 둘이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당시 "번개가 친 줄 알았다"고 무심하게 회고하는 대목은 교과서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한 장면이다. 1919년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전동례(1898~1992)씨가 치매를 앓는 와중에도 일제 만행을 또렷이 기억해내는 모습이 서늘하기도 하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라는 제목을 실감하게 된다.
'황국 소녀'에서 재일조선인 피해 기록인으로
박수남(왼쪽), 박마의 감독은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한 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독일과 대만, 포르투갈 등에서도 상영됐으나 한국 관객과 만나는 일이 제일 기쁘다"고 밝혔다. 연합뉴스영화는 과거 영상만을 이어 붙이지 않는다. 박수남 감독이 기록을 위해 보낸 인생을 돌아보기도 한다. 건축업자 아버지 덕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던 박 감독은 해방을 맞은 열 살 때까지 천왕을 신으로 여겼던 '황국 소녀'였다. 성인이 될 때까지 재일조선인의 비참한 삶을 잘 알지 못했다.
박 감독의 인생을 바꾼 건 1958년 발생한 고마쓰가와 사건이다. 재일조선인 2세 이진우가 여고생을 살해해 시체를 유기한 후 요미우리신문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범행을 알려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다. 박 감독은 이진우가 극도로 가난한 환경에서 차별받으며 자란 점에 주목했다. 이진우와 교류하며 민족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한편 피해자 가족을 찾아 아픔을 달랬다. 이후 박 감독은 재일조선인들을 만나 그들이 겪은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박 감독이 펜에서 카메라로 기록 매체를 바꾼 건 피해자들의 침묵 때문이었다. 재일조선인들이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자 그들 표정이 담고 있는 메시지라도 기록하겠다는 심사였다. 박 감독은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한 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영화를 찍으며 가장 힘들었던 게 피해자들의 침묵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피폭 피해자 분들이 이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 오셨나 하는 것을 담기 위해 마음을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비프메세나상, 서울독립영화제 독불장군상 등을 수상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스페셜 부문, 대만국제여성영화제 등에 초청되기도 했다. 12세 이상 관람가.